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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의 시선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왕과 사는 남자〉가 지운 것과 남긴 것

영화2026.04.29 11:13 조회 4,285
빅평식의 영화 비평
송곳이 되지 못한 도검, 1,628만이 증명한 영화
평점
★★★★ 4.0 / 5
추천
사극의 새로운 시선이 궁금한 관객
비추천
명쾌한 결론을 원하는 관객
빅평식이 짚는 3가지
① 시선의 전환이라는 야심
② 후반부의 구조적 균열
③ 1,628만이 던지는 사회적 질문


영화 왕과사는남자 유해진 박지훈 주연 포스터 이미지


1457년의 청령포에 바람이 분다. 폐위된 왕 이홍위(박지훈)를 태운 가마가 산자락을 오를 때, 카메라는 가마 안의 그를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가마를 지켜보는 촌장 엄흥도(유해진)의 표정을 잡는다. 영화의 첫 30분은 거의 모든 숏을 이 구도로 짠다. 왕은 거의 보이지 않고, 왕을 바라보는 자의 눈만 화면을 채운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영화의 제목 자체가 이미 답을 던져놓았다. '왕을 모시는 남자'도, '왕을 지키는 남자'도 아닌 '왕과 사는 남자'다. 모시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산다는 것. 권력의 정점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왕. 그 시선의 전환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 출발점은, 끝까지 가지 못한다.


청령포로 향하는 가마와 그를 바라보는 엄흥도의 시선  영화의 첫 구도가 던지는 질문



카메라가 약속한 것 권력 외부의 시선

장항준 감독은 이 영화에서 한 가지 야심을 품었다. 한국 사극의 익숙한 문법, 즉 왕의 고뇌를 클로즈업으로 잡고 충신의 눈물을 강조하는 그 공식에서 벗어나는 것. 카메라는 광천골의 마을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시간을 내어준다. 달리기가 빠른 자, 요리를 잘하는 자, 그물을 짜는 자. 영화의 초반 30분은 마치 군상극(群像劇)처럼 인물들의 직능과 표정을 차례로 호명한다.

이 호명은 약속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카메라의 약속. 왕의 비극이 단지 왕 한 사람의 비극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함께 직조되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약속. 이건 한국 영화사에서 흔치 않은 시도다. 장항준 감독은 〈기억의 밤〉(2017)에서도 이미 한 번 시도한 적이 있는, 중심 인물 바깥의 시선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특히 흥미로운 건 영화의 첫 갈등이다. 엄흥도가 한명회(유지태)에게 유배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 사극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구도다. 보통 사극은 권력자의 결정이 평민에게 강요되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 영화는 그 방향을 뒤집는다. 평민이 권력에 청탁하고, 권력은 그 청탁을 이용한다. 가난한 마을이 부를 얻기 위해 누군가의 불행을 자처하는 이 풍자적 출발점은, 한국 사회의 어떤 단면을 정확하게 찌른다.


균열 영화가 지키지 못한 약속

문제는 이 약속이 후반부에 가서 무너진다는 것이다. 영화의 외측에서 작동하던 풍자의 시선은, 단종이 청령포에 자리잡고 엄흥도와 정을 쌓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빠르게 휘발된다.

가장 결정적인 균열은 마을 사람들의 증발이다. 영화 초반에 그토록 공들여 소개된 인물들 달리기가 빠른 자, 요리를 잘하는 자 이 후반부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단종이 위기에 처할 때, 이들이 각자의 직능을 무기 삼아 무언가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는 끝내 충족되지 않는다. 카메라가 약속했던 군상극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영화는 익숙한 두 인물의 정(情) 서사로 회귀한다.

후반부에 갑자기 사라진 광천골 마을 사람들 - 영화의 가장 큰 구조적 균열


금성대군(이준혁)의 처리도 같은 맥락이다. 반정의 가능성을 품고 등장한 이 인물은, 정작 결정적 순간에 화면 밖에서 처리된다. 천막을 나서 어디론가 향하는 듯하더니, 다음 장면에서 사약을 받는다. 편집의 문제인지 각본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영화는 자신이 만들어둔 정치적 긴장을 스스로 해체한다.

영국 평론가 필 호드는 더 가디언 리뷰에서 이 영화를 "풍자와 감상, 사회 비판 사이에서 어설프게 양다리를 걸친 우화"라고 평했다. 정확한 진단이다. 영화는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출발했지만, 결국 어느 쪽도 끝까지 밀지 못했다. 후반부에 이르면 영화는 그저 명절 특수를 노린 한국 사극의 익숙한 자리로 돌아가 있다.


배우들이 영화를 구한다 결정적인 장면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배우들의 연기가 구조의 틈을 메운다. 그리고 그 메움은 단순한 보수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무게중심을 옮길 만큼 강력하다.

가장 충격적인 순간은 한명회 역의 유지태에게서 온다. 엄흥도의 아들에게 곤장을 치라 명령하는 장면. 유지태는 장막을 맨손으로 뜯어버리며 같은 명령을 네 차례 변주해 외친다. "쳐라", "더 쳐라", "죽이라" 같은 말이 점점 다른 무게로 변해가는 그 4분여의 시퀀스는, 한국 상업영화에서 〈끝까지 간다〉(2014)의 조진웅 첫 등장 이후 가장 강렬한 연기로 남을 만하다. 이병헌의 폭발이 화염이라면, 송강호의 연기가 물이라면, 유지태의 이 장면은 짝눈으로 짓누르는 압력이다. 신체의 크기가 만드는 위압감과 목소리의 변주가 동시에 작동한다.

장막을 뜯어내는 한명회  유지태의 연기가 영화의 무게중심을 옮기는 순간


박지훈의 발견은 더 놀랍다. 아이돌 출신의 외모용 캐스팅이라는 의심을 영화 자신이 초반에 강화한다.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 큰 소리로 웃는 장면 어색하다. 그러나 호랑이와 마주치는 장면에서부터 무언가 변한다. 그리고 한명회 앞에서 압도당하는 장면에 이르면, 박지훈은 더 이상 외모로 평가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다. 위태로운 종달새 같으면서도 칡뿌리처럼 단단한 내실. 화염이 아니라 연한 카리스마. 한국 영화는 박해일 이후 오랜만에 이런 결의 남배우를 발견했다.


유해진이라는 결정적 장면 그리고 영화사적 위치

그러나 이 영화의 최종적인 무게는 결국 유해진에게 실린다. 영화의 마지막, 빨갛게 상기된 얼굴, 덕지덕지 붙은 머리카락, 닭똥 같은 눈물. 그 한 장면에서 유해진은 더 이상 배역을 연기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1457년 청령포에 살았던 한 명의 촌장이 되어 있다. 이 영화에 결정적인 한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유해진의 연기 인생에서 이 장면이 차지할 자리는 분명하다. 〈올빼미〉(2022)의 인조 연기가 이미지의 탈피였다면, 〈왕과 사는 남자〉의 엄흥도는 이미지의 완성에 가깝다. 그가 천만 영화에서 보여주던 익숙한 코믹 연기 입에 음식을 가득 물고 외치는 그 진부한 패턴 가 이 영화 전반부에 그대로 반복될 때, 관객은 또 그것이구나 싶다. 그러나 후반부의 그 장면이 모든 것을 뒤집는다.

영화의 마지막, 엄흥도가 된 유해진  한국 영화에 남을 한 컷


장항준 감독의 연출도 이 지점에서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흥행작과 실패작이 교차해왔다. 〈라이터를 켜라〉(2002), 〈기억의 밤〉, 〈더 킬러스〉(2024) 평가는 갈렸지만 일정한 결을 유지해온 감독이다. 〈왕과 사는 남자〉는 그의 첫 사극이다. 그리고 그가 사극에서 발견한 것은 이준익 감독이 〈사도〉(2015)나 〈자산어보〉(2021)에서 보여준 결, 즉 역사의 거대 서사보다 그 그림자에 살았던 사람들의 호흡에 카메라를 두는 방식이다. 다만 이준익이 그 방식을 끝까지 밀고 가는 작가라면, 장항준은 아직 도착점에 망설임이 있다.


1,628만이라는 숫자가 말하는 것

이 영화는 2026년 4월 11일 기준 관객 1,628만 명을 넘기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2위에 올랐다. 단순히 명절 특수와 출연진의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숫자다. 한국 영화 평론계는 이 흥행이 의미하는 바를 묻기 시작했다.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이렇다. 2020년대의 한국 관객은 승자의 서사에 지쳤다. 〈서울의 봄〉(2023)이 권력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천만을 넘었다면, 〈왕과 사는 남자〉는 권력에서 밀려난 자의 마지막 4개월에 머무르며 1,600만을 넘었다. 두 영화 모두 '패자의 자리'를 응시한다. 차이가 있다면, 〈서울의 봄〉이 분노를 끌어냈다면 이 영화는 슬픔을 끌어낸다. 한국 사회가 분노의 다음에 슬픔을 필요로 한다는 신호일 수 있다.


결론 송곳이 되지 못한 도검

〈왕과 사는 남자〉는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구조적 균열이 명확하고, 감독은 자신이 만든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중요한 영화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한국 사극이 권력의 시선이 아닌 권력 외부의 시선을 시도한 흔치 않은 사례다. 비록 그 시도가 끝까지 가지 못했더라도, 시도 자체가 한국 영화의 다음 자리를 가리킨다.

둘째, 1,628만이라는 숫자가 던지는 사회적 무게다. 영화의 결함과 별개로, 이 숫자는 2026년의 한국 관객이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그 답을 영화 자신이 충분히 받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진짜 비극이다.


청령포에 남은 두 사람의 무덤  영화가 닫지 못한 질문


청령포의 가마는 산자락을 오르고, 1457년의 바람은 여전히 분다. 카메라는 끝내 왕의 얼굴을 정면으로 잡지 않는다. 그것이 이 영화의 약속이었고, 절반의 성공이었으며, 동시에 절반의 좌절이었다. 송곳이 되지 못한 도검. 그러나 도검이 송곳보다 깊이 박힐 수도 있다는 것을, 1,628만의 관객이 증명하고 있다.


빅평식의 시선 (FAQ)

질문 1. 이 영화의 풍자적 시선이 후반부에 사라진 것은 작가의 의도인가, 한계인가?

한계에 가깝다. 의도였다면 사라짐 자체가 메시지가 되어야 하는데, 영화는 그 사라짐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의 부재가 후반부에 단 한 번이라도 시각적으로 환기되었다면 의도라 부를 수 있겠으나, 영화는 그저 잊어버린다. 잊어버린 것은 한계다.


질문 2. 1,628만이라는 흥행이 〈서울의 봄〉을 넘은 것은 어떤 의미인가?

분노의 시대가 끝나고 슬픔의 시대가 왔다는 신호일 수 있다. 분노는 행동을 부르지만 슬픔은 응시를 부른다. 한국 관객이 더 이상 외치고 싶지 않고, 그저 누군가의 마지막을 함께 바라보고 싶어한다는 것 이건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의미심장한 변화다. 다만 이 해석이 맞다면, 다음에 올 한국 영화는 슬픔의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질문 3. 박지훈의 연기는 박해일이나 이제훈과 비교될 만한가?

아직 한 작품이다. 비교는 이르다. 그러나 비교될 가능성은 있다. 박해일이 〈살인의 추억〉(2003)에서 그러했듯, 박지훈은 〈왕과 사는 남자〉에서 외모 너머의 자리를 처음 점유했다. 다음 작품에서 그가 어디로 가느냐가, 이 비교의 정당성을 결정할 것이다.